신라시대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 포항에도 있다.
포항시 신광면에 위치한 신라시대 사찰터인 법광사지(法廣寺址)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3호(2만4천490㎡)로 2008년에 지정됐다.
법광사는 9세기 전반인 신라 제42대 흥덕왕 3년(828년)에 김균정이 창건한 왕실사원으로 제46대 문성왕대에 번창했다.
법광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의 조선시대 문헌에도 사찰의 이름과 위치 등이 정확히 기재돼 있다.
창건 당시에는 갖가지 보배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왕궁보다도 사치스러웠으며, 건물의 칸수를 모두 합하면 525칸이나 되어 불국사와 맞먹는 규모와 수준을 자랑했다 한다. 원효와 의상이 주지를 지낸 절이라고도 전한다.
금당 등 건물의 주초석과 연화석불대좌, 삼층석탑, 쌍두귀부, 당간지주, 사적비 등 석조 유물도 남아 있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금당터에 남아있는 불상대좌의 경우 지름 2.42m, 높이 약 2m로 9세기 전반에 창건된 사원의 불상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법광사지는 신라 왕실사원으로서의 성격과 출토 유물들의 우수성 등을 감안할 때 여주 고달사지, 원주 법천사지 등에 견줄만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법광사에 대한 기록
법광사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846년(문성왕 8)에 삼층석탑을 옮겨 세우고 난 뒤 넣은 탑지석에는 71자가 해서체로 쓰여 있는데 법광사의 창건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 내에 봉안된 탑지석에 의하면 법광사는 828년(흥덕왕 3년)에 창건한 사원임을 알 수 있다. 창건주로 등장하는 성덕대왕은 김균정의 시호인데, 그의 사후 3년 뒤인 제45대 신무왕(?~839) 즉위 원년인 839년 4월에 추봉됐다.
김균정은 제42대 흥덕왕 사후인 836년에 왕위계승을 다투다 제43대 희강왕(?~838)으로 즉위한 김제융과 제44대 민애왕(?~839)으로 즉위한 김명 등에 의해 피살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우징은 장보고와 김양의 도움을 받아 제45대 신무왕으로 손자는 제46대 문성왕으로 즉위했다. 따라서 법광사는 신라 왕족인 김균정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그의 원찰로서 그의 아들과 손자의 후원으로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15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불우조」에 ‘법광사는 법광산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669년 편찬된 『동경잡기』의 「불우조」에도 ‘법광사는 신광현 비학산 아래에 있다. 세상에 전하길, 신라 진평왕이 원효로 하여금 시주를 모아 2층의 불전을 창건케 했는데 세속에서 금당이라 부르는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법광사의 금당은 2층 전각이며, 창건을 발원한 자는 흥덕왕대의 김균정이 아니라 진평왕(?~632)으로 소급됐으며, 창건에 직접 기여한 자는 원효(617~686)라 했다.
그러나 진평왕 사후 632년은 원효 나이 16세에 불과하므로 위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이후 이 내용은 경주 김씨 일족에게 법광사가 김균정의 원찰이 아니라 진평왕의 원찰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1930년에 이르러 진평왕의 재실인 숭안전이 건립되는 근거가 됐다.
또한 조선시대 삼층석탑 중수 후 봉안한 탑지석에도 ‘숙종 24년(1698)에도 삼층석탑을 중수하였는데 비구인 명옥과 담학이 주관했다. 조선 영조 23년(1747)에도 석탑을 중수하였으며 비구인 대언이 새기다’라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삼층석탑은 지속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750년에 세워진 ‘석가불사리탑중수비’에는 사찰의 규모를 대웅전과 2층의 금당, 향화전 등 525칸의 건물을 갖춘 대찰로 기록했으며, 탑 안에서 사리구를 발견하고 재납입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1799년에 간행된 전국사찰지인 『범우고』의 「경주조」에도 법광사는 비학산에 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법광사는 18세기말내지 19세기 초까지는 법등이 이어졌으며 그 후 폐사된 것이다. 현지 주민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법광사의 폐사 시기는 19세기 후반이며 2층의 금당도 그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법광사의 주요 유물
법광사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은 금당터이다. 넓은 밭 한가운데 한 변 길이 약 20m, 높이 1m쯤 되는 네모진 흙단이 솟아 있다. 흙단 위에는 불상대좌, 고막이돌과 신방석, 주춧돌 등이 비교적 정연히 남아 있고, 남과 북 양쪽의 계단 자리도 일부 드러나 있다.
지금의 법광사 뒤편 언덕, 네모지게 흙돌담을 막은 안쪽에 ‘사층석탑’과 작은 비석이 하나씩 있다. 석탑은 각 부분의 비례로 보아 삼층석탑이 틀림없었겠으나 후대에 보수하면서 3층 몸돌 이상의 부재를 새로 만들어 올리는 바람에 4층의 기형탑이 되었다.
석가불사리탑비는 지붕돌·비신·좌대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비신은 크지 않아 높이 117㎝, 너비 48~51㎝, 두께 18㎝로 아랫부분보다 윗부분이 조금 넓다. 지붕돌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분명치 않으나 타원형을 횡으로 자른 형태이다. 비문의 말미에 건륭(乾隆) 15년(1750)에 비를 세웠으며, 신유한(申維翰)이라는 사람이 글을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쌍두귀부는 금당지에서 서쪽으로 약 53m 떨어진 곳의 밭에 동향으로 놓여 있다. 쌍귀부로 된 비좌이며, 머리를 포함한 대부분이 파손되었고, 이수와 비신은 모두 없어졌다. 이와 같은 귀부형식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에서만 확인된다. 이처럼 통일초의 무열왕릉비를 시작으로 단신두 귀부가 왕릉과 사찰에서 일반화된 상황에서 쌍신두 귀부의 출현은 신라 장인들의 왕성하고 창의적인 조영활동의 결과이다. 귀부 받침석의 규모는 길이 1.86m, 너비 1.43m, 높이 0.6m이다.
■법광사의 아픈 역사
법광사에 대한 폐사 기록은 분명치 않다. 철종대에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며, 고종연간에 몇몇 건물을 중건한 바 있으나 다시 화재를 당해 절이 없어진 뒤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절터 남쪽에 ‘법광사’라는 절이 있으나, 이는 20세기 들어 새로 들어선 것으로 원래의 법광사와는 무관하다.
1968년 8월 도굴꾼들에 의해 삼층석탑 사리공의 유물이 도단 당했다가 회수됐다. 유물의 종류는 통일신라시대 탑지석(846년) 1점, 바깥면에서 묵서로 ‘불정존숭다라니’라고 쓰여진 납석제원호 1점, 진신사리 8과 조선시대 탑지석(1747년) 1점, 청동소호 1점 등이다.
이외에도 지표에서 녹유전이 여러 점 수습됐는데 국립경주박물관, 동국대학교 박물관,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의 관문사 등이 소장하고 있다.
정리=함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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