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오원철’이 방산 한류(韓流) 초석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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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오원철’이 방산 한류(韓流) 초석 쌓았다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22.08.0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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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 25조원 무기 수출 “대박”>
한국 방위산업 기업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현대로템이 최대 25조 원에 달할 무기 수출에 나섰다. 방산(防産) 수출 사상 최대 규모를 넘어, 세계 최대 안보기구인 나토 회원국과의 첫 계약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달 27일 폴란드 국방부는 K2전차(현대로템) 980대, K-9 자주포(한화디펜스) 648문, FA-50 경공격기(KAI) 48대 등 한국산 무기 3종 수입을 위한 기본계약(FA)를 했다고 발표했다. 
기본계약은 본 계약의 전단계로 사실상 수주 계약이다.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인 구소련·독일에 의해 영토 분할과 점령, 심지어 ‘국가 소멸’이란 불운을 겪기도 했던 나라이다. 한국과 지정학적 위상이 비슷한 ‘유럽의 한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폴란드는 탈(脫) 공산화 후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유대 강화에 사활(死活)을 걸어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 한국산 무기 도입을 결정한 것은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경제를 키우고 안보를 지켜온 한국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뜻도 담겨있다. 당초 폴란드는 미국 전투기와 독일 전차 도입을 우선 검토했지만 최종적으로 한국산을 택했다.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부장관은 “기술, 가격, 도입 시기를 고려했을 때 한국의 무기 체계가 가장 적합했다”·“특히 K-9 자주포의 경우(국제적으로) 기술을 인정받고 있어 빠른 도입이 결정됐다”고 했다.

 

<미군 7사단 철수에 자주국방 의지 다져>
지난 4월 11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들을 대상으로 화상 연설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950년대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6.25) 전쟁을 이겨냈듯 우리도(우크라이나) 도움이 필요하다”며 “한국의 군사 장비가 있으면 러시아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한국의 무기 지원 호소’가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유비무환(有備無患) 호소’를 떠올리게 했다. 197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를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으로 발탁해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우리나라(대한민국)의 안보상황은 현재 초비상 상태”라면서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장비(輕裝備) 사단으로 무장시키는데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라. 처음으로 나오는 병기(兵器)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우선 시제품(試製品)부터 만들라”고 주문했다.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는 ‘엄중한 지시’를 받은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분위기와 결심에 완전히 휩싸이게 되었다. 군복은 안 입었지만 다시 입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 전략 참모본부장은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나는(오원철)은 방위산업담당 참모가 된다”

 

<기본병기 국산화 ‘번개사업’ 시동>
미국은 1969년 ‘아시아 문제는 아시안인끼리’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71년 경기도 동두천에 있던 주한 미국 제7사단을 철수시켰다. 

당시 한국은 5만 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미국을 도왔지만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7사단 철수를 강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만이 살 길이다. 미국의 방침에 일희일비하는 처지를 빨리 극복해야 한다. 고성능 무기는 외화로 들여오더라도, 기본 병기는 하루 빨리 국산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야 할 정도로 짧은 기간 내 기본 병기를 개발할 것을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지시했다. 명칭도 ‘번개사업’이었다. 

박 대통령은 ‘20개 예비군 사단을 무장시킬 경장비(輕裝備) 시제품 제작 명령을 하달했다. 국과연(국방과학연구소)의 개발담당자들이 청계천 고물 상점들을 헤집고 다니며 필요한 공구와 장비·특수강을 샀다. 그때의 청계천 고물 상점은 웬만한 물건은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종합 구매 시장으로서 공업기술의 메카였다. 

오원철 경제2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간 지 한 달여 만인 1971년 12월 17일 국산 60밀리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 시제품이 청와대 대접견실에 전시됐다. 이와 함께 화학은 한국화약(현 한화), 탄약은 풍산금속(현 풍산), 화약의 기초 원료는 남해화학이 제조업체로 지정됐다. 이것은 방산업체 지정의 효시가 됐다.

 

<북한식 자력갱생 탈피 ‘수출주도’ 개척>
1972년 어느 날 청와대 대접견실에 중앙부처의 국장급 이상 관료들이 집결한 가운데 한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북한의 공업화 현황을 컬러 필름으로 제작해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홍보영화였다. 

북한이 지은 최첨단 공장 모습이 소개되었고, 김일성이 공장들을 찾아가 시찰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1970년대 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42달러, 북한은 740달러로 남한을 3배가 넘는 시절이었다. 박 대통령은 영화를 보는 내내 무거운 얼굴로 줄담배를 피웠다. 장관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대단하다”고 응답했다.

오원철 경제수석은 “북한의 공업화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적 소견을 밝혔다. 오원철은 “북한 경제 가장 큰 특징이자 단점을 인력, 기술, 설비, 자본을 자급자족하겠다는 자력갱생(自力更生) 정책이다. 자급자족으로 만든 제품은 품질·가격에서 국제 경쟁력이 없다. 수출도 할 수 없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박 대통령에 설명하고 수출 주도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킨 후 방위산업을 육성하자고 제안했다.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건설과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 작성을 지시했다. 1973년 1월 13일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다.

 

<방산·원전 강국 도약 기회 잡아야>
박정희 대통령과 오원철 경제수석은 방위산업육성 전략을 구체화시켰다. ‘무기 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군(軍) 공장은 경제성이 없다. 민영 군수 공장도 병기 수요가 따라 주지 않으면 낭비가 심하게 된다. 

모든 무기는 분해하면 부품이다.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무기의 부품별-뭉치별로 유관 공장에 분담시켜 제작케함으로써 무기 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킨다’는 대전략(大戰略)을 세워 ‘방산 한류(韓流)’의 저력을 키웠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육성·방위산업의 단계적 발전 전략을 제시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 오원철 경제수석을 ‘국보(國寶)’라고 호칭하면서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게 했다. 박정희의 강력한 리더십과 오원철의 실용적 발전 방안으로 저력을 키워온 한국의 방위산업이 ‘폴란드에 최대 25조 원 방산 수출’이란 장대한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기간 중 나토와의 새로운 파트너십 체결 및 나토 주재 대표부 개설에 합의했다. 나토와의 방산 및 원전 건설 협력 확대가 이뤄질 전망이다.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유럽 진출이 거론되고 있다. 

한국 기술의 우수성과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를 입증해 방산·원전·강국(强國)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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