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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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교류
  • 박성천
  • 승인 2009.03.0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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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환 추기경의 몇가지 안되는 유품중에 길상사(寺)에서 법정스님과 합장인사하는 사진이 있었다. 구도와 무소유·가난한 삶의 도반(道伴)으로 여기면서 소중한 사귐을 가지신 것으로 보인다. 김추기경이 선종하시자 법정스님은 ‘김수환 추기경을 떠나보내며’란 특별기고를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서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있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한 이 나라, 이 아름다운 터전에 아직도 개인간 종파간, 정당간에 미움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 진다. 이러한 성인이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났는데도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먼 것인가”
법정스님의 추모의 글에 무거운 슬픔과 진솔한 애도가 담겼다.
천주교는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타칸공의회 이후 다른 종교에도 옳고 성스러운 것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국 천주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김수환 추기경을 1987년 조계종 기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가 하면 명동성당 특강강사로 법정스님을 초청하기도 했다. 김추기경은 종교간 화해운동을 추진했다. 김추기경과 법정스님은 무소유·빈자를 위한 가난에 깊은 교감을 나눴다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무감에도 나온 ‘땜질식 사랑’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김추기경>
“우리는 맑은 가난, 즉 청빈(淸貧)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맑은 가난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고,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적은 것으로 넉넉해 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해야한다”
김추기경은 성(聖)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기독교 최대의 성자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낮은 자가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가장 그리스도의 성심을 품고 산 사람이었다.
김추기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위한 ‘우선적 사랑’에 못다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법정스님은 수도자들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보리심, 진리에 대한 각성이 이루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맑은 가난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고 강조했다.
또 “어려울수록 물질뿐 아니라 말 한마디, 표정하나라도 나눠야한다. 나눌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반문한다.
김추기경과 법정스님, 나이와 종교를 떠나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던 두 분은 2005년 길상사에서 열린 석탄일 음악회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서로의 성스러움을 인정해 종교간의 화해를 실천했다. 법정스님은 김추기경의 유지를 받을어 ‘거룩한 가난’·‘밝은 가난’을 계속 설파하실 것이다.
두 분의 인연과 교류가 너무나 아름다워 아쉬움 또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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