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탄생 100주년…이제 공(功)을 재평가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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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주년…이제 공(功)을 재평가 해야”
  • 유수원 편집인
  • 승인 2017.11.1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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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탄생 100주년 동상설치 불발>

지난 14일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이 되는 날.

박정희 대통령 기념 재단이 이 날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서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 추진 모임’으로부터 동상기증 증서를 받는 행사가 열였다.

동상건립 추진 모임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6.25 때 한국을 도와준 해리 트루먼 대통령, 대한민국 5000년 이래의 번영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며 동상 제작·기증 행사를 갖는 취지를 설명했다.

극좌 단체 민족 문제 연구소·정의당·노동당·민주당 관계자들이 난입해 ‘원조적폐’ 박정희 동상을 서울 시민의 땅에 세우겠다는 준동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친북 좌파 단체들은 “친일파”·“독재자”·“원조적폐”라고 소리치며 격렬한 몸싸움을 시도했고 동상설치를 찬성하는 보수단체는 “종북 좌빨 물러가라”·“빨갱이들은 북한으로 가라”며 맞불을 놓았다.

‘박정희 지우기’에 나선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폭주’에 기세등등해진 좌파들이 “박정희는 청산의 대상이 될지 언정 결코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트럼프의 대한민국 찬가(讚歌)의 주인공은 이승만·박정희>

지난 8일 국회에서 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설은 한국의 성공과 북한의 실패에 대해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큰 울림을 안겼다.

트럼프는 “1953년 정전협정당시 아름다운 서울 대부분이 초토화됐다”고 회상한 뒤 “한국에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며 경제 규모·평균수명까지 북한과 비교 소개했다.

한미 동맹을 맺어 자유 대한에 적화(赤化)방파제를 구축한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한강의 기적’을 설계한 박정희 산업화 대통령의 위업을 자연스럽게 곱씹어 보게 했다.

2003년 제84주년 3·1절 기념사를 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고 헬조선 타령을 늘어놓았다.

좌편향 역사관에 치여 현대사(史)를 비하하는 인식이 온 국민을 짖누르는 병리 현상을 ‘트럼프 연설’이 치유했다.

‘한강의 기적’을 입에 올리면 ‘박정희 독재 미화(美化)’ 뉴라이트 사관이란 낙인을 찍어 폄훼하는 주사파(主思派)사관을 청산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감을 되찾는 ‘한국사 인식’을 미국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통해 새롭게 갖추게 됐다.

<운동권 출신 5인 ‘내가 틀렸고 박정희가 옳았다’>

‘주간조선’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특집으로 한 때 그를 비판했던 70대부터 40대까지 운동권 출신 인사 5인의 솔직한 이야기를 수록했다.

▲김세중 전 연세대교수(70)-한국은 박정희 시대 때 산업혁명을 통해 전 근대적이고 정태적 농업사회에서 근대적이고 동태적 사회로 변모했다.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등을 반대를 무릎쓰며 건설해서 경제발전이 가능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60대)-박정희 사망소식에 쾌재를 불렀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70학번으로 입학했고 구로 공단에 위장 취업해 제적당했다.

‘자본주의 본산’ 미국을 경험하고 전향(轉向)했다.

도지사 시절 경기 북부에 고속도로를 놔달라고 중앙정부에 요구했다.

나는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과 자동차산업 추진을 반대했다.

지사재직시절 경기도 일자리의 25%가 자동차산업과 연관되었다.

내가 50~60대에 비로소 알았던 것을 박정희는 1960~1070년대에 다 알고 있었다.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산업 혁명을 이룬 박정희는 위인(偉人)이다.

▲이동호 여의도 연구원 부원장(50대)-민족해방(NL)계열 주사파 주도로 결성된 전대협(전국대학 대표자 협의회)에서 연대사업 국장으로 일했다.

1997년 북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 망명을 보고 전향을 결단했다.

박정희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박정희의 최대 공적(功績)은 한국인에게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 넣은 것.

수출 주도형 경제를 통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꺠웠고 그 성취를 통해 또 다른 성취를 이뤘다.

박정희 공(功)은 8~9, 과(過)는 1~2정도로 본다.

지금과 같이 저상장의 늪에 빠져있는 우리경제를 박정희 경제 모델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

▲이강희 한국자유회의 간사(50대)-82학번으로 서울대에 입학, 총학생회 핵심간부를 지냈다.
PD(민중민주)계열로 박정희를 부정평가했다.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에서 일하며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관여하면서 객관적 지표를 체크했다.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파악하고 ‘영웅’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가 ‘4대국 한반도 안전보장’과 ‘북한과 협상을 통한 3단계 통일론’·‘대중 경제 경제론’을 설파했는데 만약 이것이 현실화 됐다면 오늘 날 고도성장은 불가능했다.

박정희 시대는 세계사적 유례가 없는 성취의 시대였다.

▲이종철 바른 정당 대변인(40대) 1995년 고려대 총 학생회 회장에 당선됐다.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의 주축이 된 ‘범청학련 통일 대축전’에 참가해 시위를 주도했다.

대학 졸업 이 후 박정희를 비판했던 나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았다.

탁월한 지도력과 추진력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박정희가 있었기에 훗날 민주화도 가능했다.

이제는 박정희의 과(過) 아닌 공(功)에 대해서 재평가할 때다.

<5천년 보리고개를 추방하고 산업화 초석 놓은 영웅>

100년 전 태어난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 수출은 4100만 달러였다.

그가 퇴장했던 1979년 1인당 국민 소득은 1647달로, 수출은 150억 달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61년 국민의 63%가 1차산업에 종사하던 농업사회는 1979년 국민의 63.4%가 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를 독재자로 과(過)만 부각시킬 수 없다. 그는 대한민국의 삶을 발전적으로 개조한 지도자였다.

그가 실시한 모든 정책은 정계(政界)·학계(學界)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그가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자 경제 학계가 들고 일어났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경제학원론’의 저자 조순 교수와 ‘한국경제론’의 저자 변형윤 교수는 “경부 고속도로는 소수의 부자가 가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돌러 다니는 유람로(路)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비판했다.

대권도전에 나섰던 양김(兩金), 김영삼·김대중은 경부 고속도로 톨게이트 공사장 불도저 앞에 “우량농지 훼손 절대 반대” 플랜카드를 들고 드러누웠다.

국토 대동맥 구축·전국 1일 생활권시대 개척을 내세워 대국민 설득전을 전개하면서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했다.

봄이 되면 먹을 게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면서 연료가 없어 나무를 마구 벌채해 민둥산 천하가 되었다. 다수확 통일벼를 보급하고 연탄을 공급하면서 사막화 산천에 조립을 해 ‘기적의 산림(山林) 복원국’이 됐다.

<새마을 운동 지우기는 새로운 ‘적폐’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리커창 중국총리는 지난 1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회담을 갖고 양국 각종 교류 협력을 조속히 정상궤도로 회복 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 날 문대통령은 “중국에 전파된 새마을 운동이 성과가 있다면 지속적으로 추진해 달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졋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한 일부국가 정상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했던 새마을 운동 지원 사업에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웅산 수지 버마 국가고문이 문 대통령에게 ‘새마을 운동 지원’에 각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보수 정권이 벌린 사업을 무조건 적폐로 보면 안된다.

이제 박정희의 공(功)을 재평가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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