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장의 ‘이박사’ 호칭은 ‘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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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장의 ‘이박사’ 호칭은 ‘망발’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20.08.0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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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지칭 기피 박사로 일관>

육군 중장 출신 박삼득 보훈처장(육사 36)은 지난달 19일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5주기 추모식에서 이 전 대통령을 대통령아닌 박사로만 지칭해 논란이 일어났다.

박 처장은 이 날 낭독한 추모사에서 7차례 언급된 이 전 대통령을 모두 박사라고 표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줄곧 박사님으로 지칭하자 참석자들이 술렁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박사가 뭐냐고 소리쳤다(719일자 중앙일보 보도). 이를 두고 이 전 대통령을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꺼리는 문재인 정부 분위기가 투영된 것이다는 얘기가 나왔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10년간 추모사 가운데 이승만 전 대통령을 박사라고 지칭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조선일보 분석). ‘박사라는 지칭에 대해 문재인 정부와 좌파진영의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전 대통령의 독재 이력 등 과()를 내세우고 건걱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박사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통합당 윤재옥 의원실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서 올해 이승만 전 대통령 추모사는 행정사무관이 직접 작성했고 따로 수정한 사람이 없다는 취지로 보고했다.

보훈처장은 어디까지나 읽기만 했고, 추모사 작성 전반은 사무관 주도로 진행됐다는 주장이다.

장관급 보훈처장의 추모사 논란에 내놓은 궁색한 변명이었다.

<통일부 장관이 김구 국부론거론>

지난 달 23일 열린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國父)라는 주장에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우리의 국부는 김구(金九)가 됐어야 했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이승만 국부론수용을 거부하는 것은 고사하고 국회라는 대의기관에서 김구 국부론을 거론했다.

통합당 박진 의원에 따르면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19879월 전국대학생대표자 협의회(全大協:전대협) 1기 의장시절 만든 동지여 전진!동지여 투쟁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미국이)이승만 괴뢰 정권을 내세워 민주해방 투쟁의 깃발을 갈가리 찢고자 책동했다”· “세계민중의 철천지 원수 아메리카 침략자(미국)의 파쇼적 통치는 한국에서의 모든 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인영 후보자는 이승만 정권은 괴뢰 정권’ ‘미국이 대리 통치자로(이승만 정권을) 육성했다 는 이 (문건의)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우리나라 초대 정부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여전히 극좌파·운동권 인식에 갇혀 있는건 아닌지 우려를 낳았다. 이인영이 1기 의장 시절의 전대협(全大協)은 주사파 지하 조직에 장악돼 있었다. 골방에 김일성·김정일 사진을 걸어두고 충성 맹세를 했다는 것은 구체적 증언이 있는 사실이다.

편향된 대북관을 가진 통일부 장관이 균형잡힌 정책 수립이 불가능하리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 “김구는 건국보다 통일이 먼저주장” >

이동복 북한 민주화 포럼 대표(72년 발족 남북조절 위원회 남측 위원)백범(白凡) 김구는 대한민국 중경(重慶) 임시정부 주석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거두(巨頭) 였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건국보다 통일이 먼저라는 소신을 앞세워 1947년의 유엔 총회 결의에 의거해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에 반대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1948년의 5.10 제한 국회의원 총선거 참여를 거부했고 5.10 선거를 통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총회 결의에 의하여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부에 참가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는 것이 부정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고 지적했다.

김구는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자유중국 총통이 보낸 특사와의 대화에서 평양에서 나(김구)를 가리켜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자 들이 있더라” “내가(김구)이번에 평양에 가보니 저들(김일성 세력)이 엄청난 군사력을 키우고 있어서 남쪽에서 단독 정부를 세워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더라며 북한의 6.25예언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 대표(이동복)대한민국의 정통성·정체성에 입각해 대북한 협상을 수행해야 할 통일부장관(이인영) 김구 국부론을 주장하는 것은 망언이다고 비난했다.

<이승만 지지율은 92% 김구는 7%에 그쳐>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부정한 이승만 초대 건국 대통령은 유엔이 승인한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고, 지지율은 무려 92.30%로 김구가 얻은 6.67%에 압도적이다.

제헌 헌법(58)에서 정·부통령 선거는 무기명 투표로 재적의원 2/3 출석과 출석의원 2/3 지지받는 후보가 당선이 확정되는 것으로 했다.

선거인수(국회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 투표(투표율 98.99%)를 해 이승만 후보(대한독립촉성 국민회)180표를 얻고, 김구후보(한국독립당)13표를 얻었다.

이승만 후보가 김구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눌러 초대·건국 대통령이 됐다.

이 선거는 후보자 등록없이 의원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적어서 투표하는 방식이어서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를 거부한 김구·안재홍도 득표했다.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 악마성의 꿰뚫어 보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비판 논문을 작성한 석학이었다. 하와이 독립운동시절 태평양 잡지’ 19233월호에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꿰뚫어보는 공산주의의 당부당(黨不黨)’ 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박사는 공산당의 부당한 점으로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자본가 없이 하자 지식계급을 없애자 종교단체 혁파 정부도, 군사도, 국가사상도 없이 한다 함을 꼽았다.

미군정청의 발표에 따르면 해방정국에서 국민들의 사상(思想)분포는 70% 이상이 좌익(공산주의 선호) 성향이었다. 가난하고 무지하여 가진자(有産)의 재산을 뺏아 무산(無産)계급에 나워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공산주의 악마성을 꿰뚫어 본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단행해 남로당의 세력확장을 제압했다.

<추미애도 이승만의 농지개혁극찬>

검찰개혁은 팽개치고 검찰장악에 노심초사하는 법무장관 추미애는 민주당 대표시절인 201796이승만 대통령이 단행한 1950년 농지개혁이 60~70년대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단행해 농민들 65%가 자작농(自作農)이 됐고, 국민들로부터 열화같은 지지를 얻었다이 에너지가 내나라를 지키겠다는 기운으로 이어져 6.25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농지개혁의 기운이 1960~1970년대에는 눈부신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됐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대표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평가로는 이례적이다는 논평을 받았다. 연공 주의자 김구와는 달리 공산주의 악마성을 꿰뚫어보고 유엔 지지하에 단독 정부,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과()보다 공() 이 큰 위인(偉人)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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