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 부정 좌파는 ‘우물 안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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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 부정 좌파는 ‘우물 안 개구리’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15.10.02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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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민련 최고위원 이용득(전 한국노총 위원장)은 지난 3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 위원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국민들이 새마을 운동을 성공시킨 영웅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길 바랐는데 ‘저희 아버지(박정희 대통령)가 성공시킨 분이다’고 강조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꼬집었다.

이용득은 박 대통령이 UN 개발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새마을 운동’을 홍보한 것과 관련해 “새마을 운동을 이끌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하셨다. 그러나 강제적 추진에도 열심히 따라주었던 국민이 영웅이었다”고 지적했다.

“새마을 운동은 속임수”라는 극언을 퍼부었던 DJ(김대중 전 대통령) 보다 호의적 반응을 보인 것은 이례적이었다.

2010년 <김대중 자서전>이 출간됐다.

‘내 자서전은 사후(死後)에 출판하도록 하라’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서거 1주기를 맞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

이 자서전은 DJ의 구술과 각종 자료를 기초로 저명한 작가가 줄거리를 구성하고 초고를 집필한 후 DJ가 직접 검토·수정한 것이다.

DJ는 그의 자서전에 ‘20세기가 낳은 비범한 정치가’·‘평화와 화해의 실천가’ 등 자화자찬(自畵自讚)을 잔뜩 늘어놓은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증오와 비판으로 일관했다.

경부고속도로건설·포항제철 건립 등 박정희 시대의 성취를 전면부정했다.

특히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잘 살게 되었다는 선전은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극언까지 기술했다.

‘아침마다 마을에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정작 농촌은 골병이 들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 농촌은 변한 것이 없었다’고 평가절하했다.

18년간 최대 정적(政敵)으로 전선(戰線)을 형성했던 박정희 시대를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억하심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박정희 시대를 전면부정하는 인식은 협량(狹量)으로 비쳐진다.

식언(食言)·말 뒤집기에 능했던 DJ는 ‘새마을운동’ 인식에 이중적 태도는 없었을까.

DJ는 15대 대통령 취임첫해인 1998년 12월 서울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 치사를 통해 “지난날 우리는 전쟁이 폐허 위에서 세계 열한번째의 경제를 건설했다”며 “여기에는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마을 지도자들의 열정과 헌신이 배어 있다”고 치하했다.

또 DJ는 1999년 17개 시도별로 개최된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 보낸 ‘대통령 축하메시지’를 통해 “새마을 운동이 지난 30년 동안 이땅의 가난을 몰아내는데 구심적 역할을 다해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DJ가 새마을 운동에 대해 극찬(極讚)에서 극언(極言)으로 돌변한 까닭을 유추해보면 식언(食言)을 되풀이 하는 인격적 특질을 느끼게 한다.

DJ집권당시 전국최대의 조직 ‘새마을 운동’을 다독거려 정권 안정에 활용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포용했고, 퇴임하자 ‘영원한 정적(政敵) 박정희’를 깎아내리기 위해 ‘말 바꾸기’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에 공정한 평가는 못할망정 ‘어처구니 없는 폄하’는 ‘DJ의 협량’을 증거하는 자료로 제시되고 있다.

좌파집권 10년을 이어간 노무현 정부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장기집권 수단이었다’고 기술함과 동시에 ‘김일성의 천리마운동은 북한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적었다.

‘김일성은 무조건 긍정하고 본다’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바이러스가 골수에 박힌 ‘주사파 역사관’을 버젓이 기록했다.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은 ‘한강의 기적’을 도출했지만 3대 세습(60년) 김씨 왕조는 ‘인민의 지옥’을 이어가고 있어 되레 ‘박정희 향수(鄕愁)’를 자극하고 있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기 위해 몰려오는 아프리카 저개발국가 지도자들은 “박정희가 독재자? 절대 빈곤을 겪어보지 않고 비난하기는 쉽다. 적절한 때 나라의 힘을 결집시킨 ‘박정희 리더십’은 ‘한강의 기적’을 도출했다”고 입을 모은다.

리더(Leader)는 ‘그 사람을 따르는 누군가(Follower)’가 있는 사람이다.

리더십의 절반은 팔로워십이 차지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 횃불을 들자 5천년 보리고개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따라 나섰다.

1970년 쌍용양회·동양시멘트 등 시멘트 생산 대기업들이 재고가 쌓여 부도위기에 몰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초가집을 없애고, 기존 흙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기로 결정하고, 전국에 한 마을당 600포씩 배정키로 했다.

배급받은 시멘트를 안 쓰고 썩힌 마을은 다음 지원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경쟁을 유도했다.

배정 시멘트를 활용하는 마을에 철근 등 자재를 보내며 자발적 경쟁을 각 마을에 유도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비결은 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이었다.

성과가 우수한 마을에는 지원을 확대하고, 부진한 마을은 탈락시키는 경쟁도입·인센티브 전략이 ‘성공의 방정식’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을마다 그냥 균등배분으로 시멘트를 주고 전기를 넣어주지 않았다.

잘하고 못하는 정도를 점수로 매겨서 고득점 마을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배정하고 전기를 넣어주었다.

마을마다 경쟁이 생겨 새마을 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에 퍼져나갔다.

공산주의는 경쟁이 없어 망(亡)했고, 자본주의는 경쟁 속에 흥(興)했다.

협동의 원리는 공산주의를, 시장경쟁의 원리는 자본주의를 상징했다.

협동의 원리는 경쟁의 원리보다 효율이 떨어져 현대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에 경쟁의 원리를 도입한 것은 ‘공산주의의 비효율’을 극복하는 ‘혜안’으로 주목받았다.

1972년 유신 직후 시작된 중화학 공업 육성전략에도 차별화 원리가 철저히 적용됐다.

검증된 기업에만 파격적 금융·세제지원이 실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에 불균형 성장전략을 도입했다.

잘 나가는 마을에 철근을 추가배정하고 전기를 우선 공급하는 차등지원을 단행해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새마을 운동은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자발적 참여가 원동력이 되어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의 불균형 성장전략에 주목한 지도자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설계자 등소평.

등소평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공산주의식 평준화보다 선부론(先富論)을 주창했다.

‘전국의 모든 지역, 모든 국민이 한꺼번에 부자(富者)가 될 수 없다. 중국의 일부지역, 일부사람이라도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등소평의 선부론 주창으로 탄생한 것이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 ‘선천’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지도원리, 차등지원·불균형 성장전략이 중국의 개혁·개방에 이입(移入)되었다.

중국의 ‘박정희 따라하기’·‘새마을 배우기’는 등소평의 집권시절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의 장기집권 수단이었다’고 폄하했던 노무현은 새마을 운동을 예찬하는 깜짝이벤트를 연출했다.

그는 2003년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바깥에 나가 보니까 정말 많은 나라 지도자들이 우리 새마을 운동을 부러워하며 칭찬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DJ의 ‘박정희 증오’를 이어가던 노무현은 새마을 운동 인식의 대전환을 보였다.

지난달 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본부에서 ‘새마을 운동 고위급 행사’가 열렸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산불처럼 새마을 운동이 번지고 있다”·“유엔역사상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이 회원국에 도입되고 실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새마을 운동이 유엔 무대에서 빈곤퇴치 모델로 조명받고 있다.

‘리더 박정희 대통령’과 ‘팔로워 한국 농민’들이 도출한 ‘절대빈곤 퇴치’ 성취가 글로벌 발전 모델로 확산되고 있다.

‘박정희의 성취’를 외면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이어가는 좌파들은 ‘새마을 운동은 속임수’라고 극언했던 DJ유산을 극복해야 국민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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