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두꺼운 얼굴’·‘시커먼 속셈’ 부정적 유산 청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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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두꺼운 얼굴’·‘시커먼 속셈’ 부정적 유산 청산해야”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15.11.2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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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운명은 정치 지도자의 철학과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역사적 통찰과 지성을 갖춘 지도자는 ‘나라의 미래’를 개척한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려는 정치가는 다음 세대와 미래를 생각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날뛰는 정상배(政商輩)는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다음 세대와 미래를 생각하며 투신했던 정치가는 누구였고, 권모술수(權謀術數)로 당권·대권을 잡아 국민들의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정상배(政商輩)는 누구였을까.

인물의 크기는 관(棺) 뚜껑을 덮어놓고야 알고, 선거결과는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고 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국가장(國家葬)은 한국 정치 지도자들 중 옥석(玉石)을 가려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닷새간의 국가장을 끝내고 지난 26일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됐다.

국회의사당 잔디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는 7000여명, 현충원 안장식에는 550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됐다.

여야가 ‘위대한 의회주의자’로 추념하고, 종편들이 고인의 업적을 칭송했다.

2009년 타계한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민주주의의 화신(化身)’으로 칭송한 데 이어 YS(김영삼 전 대통령)은 ‘의회주의 신봉자’로 자리매김했다.

동고동계(DJ)·상도동계(YS) 나눠 당권·대권장악 이전투구를 벌였던 ‘민주화 그룹’이 합심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YS는 과연 ‘큰 그릇’이었을까.

YS는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을 빌릴 수 없다’는 ‘건강격언’을 입에 달고 다니며 조기축구·조깅을 즐겼다.

‘머리를 빌린다’는 가정(假定)을 앞세운 것은 자기의 두뇌용량이 크지 않음을 자인한 전제(前提)이다.

‘서울대 철학과’ 졸업으로 목포상고(商高) 출신 DJ보다 가방끈은 길었으나 두뇌 충전(充電)에 소홀하다는 비평을 받았던 그가 ‘정관정요’를 읽고 있다는 소식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YS가 대통령 당선인 시절 ‘정관정요’를 읽고 있다는 신문보도 몇줄에 정관정요가 베스트 셀러 상위권에 곧바로 진입했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599~649년)이 신료들과 정치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것으로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당태종은 국가와 만민을 위해 성의를 다하는 언행을 남겨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그의 집권과정에는 ‘현무문의 변(變)’이라는 쿠데타 과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태자이자 맏형을 선제 사살하고 2대 왕위에 올랐다.

YS는 당태동의 집권 과정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2011년 7월 YS 상도동 자택 앞은 ‘어버이 연합’ 등 보수단체들의 규탄시위로 시끌벅적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신임대표가 인사차 방문한 자리에 ‘박정희처럼 쿠데타한 놈’이라는 막말을 쏟았다.

“아무런 철학이 없는 국정운영으로 국가적 재앙인 IMF 사태를 초래한 김영삼은 보릿고개라는 말을 없애고 국민들을 두루 잘 살게 한 박정희 대통령의 발바닥에도 못 미칠 위인이다”며 “YS, 니가 한게 뭐냐!”는 플래카드까지 제작해 항의방문을 이어갔다.

YS가 즐겨쓴 휘호 ‘대도무문(大道無門)’처럼 그의 막말은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 대표시절 자식 김현철의 공천을 보류시켰다며 앙심을 품고 ‘칠푼이’라는 비하도 서슴지 않았다.

YS의 ‘한국 산업화의 초석’ 박정희-박근혜 부녀(父女)에 대한 증오는 병적수준이었다.

YS정부 초대 통일원 장관겸 부총리였던 사회학자 한완상은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소중할 수 없다’는 한미동맹에 부정적 어귀를 대통령 취임사에 넣은 주인공.

YS를 이념없는 보수주의자로 둔갑시킨 좌파이론가이다.

그는 “YS가 목적달성을 위해 무슨 수단도 써도 된다는 편법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여겼다”·“편법주의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쿠데타라고 생각했다”며 “5·16 혁명을 쿠데타로 바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편법주의’를 경계했다는 YS는 ‘5·16 설계자’ JP(김종필)과 ‘군부독재’ 노태우와 손을 잡는 ‘정당쿠데타’를 단행했다.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노태우)과,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JP)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새누리당 전신)을 만들었다.

당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대통령 병(病)’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유신본당(JP)·‘군부독재(노태우)와 야합했다.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후 집안 단속도 하지 않아 아들 김현철까지 대통령 흉내를 내는 ‘소통령’이 되어 거액을 챙겼다.

YS는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속마음’을 드러냈다.

14대 대선직전 노태우 대통령에게 대선자금 3000억원을 직접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하자 곧장 희석작업 ‘역사 바로 세우기’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재판에 회부했다.

YS 자신을 대통령이 되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노태우는 물론 전두환까지 투옥시켜 사형선고까지 받게 하는 ‘세기(世紀)의 배신’을 감행했다.

그의 정치적 노림수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속셈’이 경제운용에는 통하지 않았다.

YS는 금융실명제 실시로 지지율이 폭등하자 자본시장개방과 금융자유화를 골자로 하는 ‘세계화’를 밀어붙였다.

선진국 기준이 되는 OECD회원국 가입 치적쌓기를 노렸다.

YS 가신들이 몸통이 되는 정경유착이 횡행했다.

한보그룹·삼미그룹·기아자동차가 도산했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밀물’ 외국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단군 이래 최대 국난(國難) ‘IMF통치’가 빚어졌다.

YS는 무뇌아(無腦兒)에 가까운 경제상식으로 외환위기를 불렀다.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 실업자가 양산됐고, 국민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YS는 그의 자서전 ‘40대 기수론’에 ‘중학교 2학년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와 야심을 가졌다’고 적었다.

‘대통령’에 걸맞는 통찰력과 리더십을 쌓아가지 않고 대중적 인기 구축에 올인해 ‘민주화 기수’가 되었으나 경제분야에서는 ‘저능아’였다.

YS는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국가운영의 안정과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각성을 국민들에게 제공했다.

‘민주화’라는 단어가 야권정치세력의 독점물로 사용되자 이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어 부정적 의미로 둔갑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YS의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속셈’의 계승자들이 속출하고 있어 ‘민주화’ 작업이 시급해졌다.

YS의 국가장(國家葬)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가족장(家族葬)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떠올리게 한다.

1970년 11월 13일 프랑스 영웅 드골의 장례식은 100세대가 조금 넘는 작은 마을 그의 고향 ‘콜롱베’에서 검소하게 치러졌다.

드골은 2차대전 전후 위기의 프랑스를 두차례나 건져낸 구국영웅.

국가를 위해 위대한 헌신을 한 거인이었지만 자신은 평범한 아버지이고 한 사람의 국민임을 잊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72달러 보통관에 담겨 그의 유언대로 19살 어린나이로 죽은 딸 곁에 묻혔다.

그날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38개국 국가원수와 80개국 조문대표 등 3천여명이 모여 엄숙한 진혼미사를 올렸다.

수십만명 파리시민들이 퍼붓는 초겨울 비를 맞으며 드골 장군의 서거를 추념하는 침묵행진을 했다.

그가 서거한 지 40여년이 지나도 프랑스 국민들은 관문을 드골공항으로, 프랑스 최대 항공모함도 드골호(號)로 명명(命名)해 위대한 리더십을 기리고 있다.

24일 여의도 YS 영결식장은 썰렁했다.

국민들은 YS의 ‘두꺼운 얼굴’·‘시커먼 속셈’ 등 추악한 권력욕(權力慾)도 함께 묻히기를 바라는 듯 했다.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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