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남대총서 유리병 출토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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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대총서 유리병 출토 주목
  • <하효진 기자>
  • 승인 2009.09.1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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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모아 복원… 로마제국 생산제품 추정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된 봉수형 유리병(국보제193호).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몸통은 타원형의 계란 모양이고, 주구는 물을 따르기 편하게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오므렸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청 색 줄이 있고, 손잡이에 는 금실이 감겨 있다.
경주 지역의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남분·북분)의 발굴이 시작된 지 만 2년이 지난 1975년 7월, 드디어 22m가 넘는 봉토의 흙과 자갈돌을 걷어내고 남분(南墳)의 피장자가 누워 있는 심층부에까지 도달했다.

발굴단은 피장자의 머리맡에 있는 부장품 수장곽 속에서 많은 유물들과 섞여 바스러진 채 흩어져 있는 유리조각들을 핀셋으로 주워 모았다. 아마도 발굴 현장에서는 이 유리 파편들이 전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실에서 복원을 마쳤을 때,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유리병(높이 25㎝) 하나가 새롭게 탄생했다.

이 병은 물을 따르는 주구부(注口部)가 봉황 머리같이 생겼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봉수형(鳳首形) 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는 아직까지 이런 유리기물이 출토된 적이 없다. 본래 그리스 도기(陶器)의 명칭에서 유래한 '오이노코에'라고 하는 이 유리병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에서 4세기 말경부터 생산되어 동쪽으로 확산된 실크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아마도 북쪽 초원지대의 스텝루트를 통해 전파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병의 손잡이 부분이 금사(金絲)로 감겨 있었던 점이다. 취약한 부분을 금사로 보강하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신라인들이 유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된 봉수형 유리병(국보제193호).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몸통은 타원형의 계란 모양이고, 주구는 물을 따르기 편하게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오므렸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청 색 줄이 있고, 손잡이에 는 금실이 감겨 있다. 남분과 북분(北墳)에서는 이런 '후기 로만 글래스'(4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까지의 로마 제국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가 10개나 더 나왔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북분에서 출토된 로만 글래스 중에 신라산(産)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는 새로운 평가가 근년에 나오고 있는 점이다. 신라공예사를 다시 검토해야 할 맥락임에 틀림없다.

또 북분에서는 금은제 고배(高杯)들이 발굴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유물은 영락 장식이 달린 순금으로 만든 고배이다. 영락(瓔珞)은 본래 금관이나 장신구에 매달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게 하여 동감(動感)을 돋우는 것으로, 이 금속기법 역시 중앙아시아로부터 실크로드를 타고 신라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릇 전두리에 영락을 다는 방식은 신라인의 예술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배는 아마도 예기(禮器)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실크로드의 금속공예 테크닉을 두루 섭렵한 신라 공예의 장인 기질은 남분에서 나온 은제합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릇과 뚜껑의 구연부(口緣部) 그리고 꼭지의 이파리 문양을 금으로 도금하여 조형적 악센트를 가했는데, 이는 흑해 연안과 이란의 사산왕조 은공예 기법과 상통하는 형식이다.
4세기 후반~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의 다양한 유물들과 북방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라는 황남대총의 묘제(墓制)를 볼 때, 그 당시 신라문화가 얼마나 국제적인 흐름에 개방적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며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하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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