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임용회장 묘소 도굴 “불행 중 다행”
상태바
故 이임용회장 묘소 도굴 “불행 중 다행”
  • <기동취재팀>
  • 승인 2010.02.20 15: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이 가득 “최악의 묘자리” 판명 유족들 서둘러 移葬
도굴범이 풍수지리에 해박 “幽宅이 좋지않아 범행” 주장
청하주민 “젊은이 수천명 취업시켜”이회장의 愛鄕 칭송

고 이임용 회장
도굴범이 파헤쳐 두골을 훔쳐갔던 태광그룹 창업자 고 이임용 전 회장의 묘소(포항시 북구 청하면 서정1리)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유족들로서는 묘소를 다른 것으로 옮길 수 있어 큰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후문.

도굴범 정모씨(49)는 이회장의 두골을 훔친 뒤 실명을 밝히면서 10억원을 요구 했다가 경찰에 바로 검거 됐었다.

그런데 도굴범이 파헤친 이회장 묘소에는 물이 가득차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배산임수 명당인줄 알고 묘소를 쓴 자손들로서는 도굴범에 의해 최악의 묘자리 였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
이 사실에 충격을 두 번 받은 자손들이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할 수 있어 내심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골을 찾은 유족들은 이 회장 묘소를 도굴된 묘소 바로 위편에 다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청하 주민들은 묘소를 파헤쳐 유골을 훔쳐 돈을 요구한 도굴범의 범죄 행위는 자손들로서는 용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죽은 사람이지만 물속에 누워 있었을 이회장을 생각하면 도굴범이 이회장을 편하게 잠들도록 도와준 꼴이 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도굴범 정씨는 지난 1999년도에는 롯데 그룹 신격호 회장 부친 묘소를 파헤쳐 유골을 훔친뒤 8억원을 요구 했고, 2004년도에는 충남 공주에 있던 한화그룹 이승연회장 조부 묘소에 같은 범행을 저지런 상습범이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고 대가를 치루고 나면 훗날 이회장을 물속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 도굴범에게 이회장 자손들은 그에 대한 사례를 하는 것도 좋은 일이 될 수 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도굴범 정씨는 국내 30여개 대기업 가족사 연구를 한데다 5년여 동안 교도소에서 풍수지리학을 공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져 이회장 묘소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정씨 신통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포항시 청하면 서정리에 위치한 태광그룹 선산 고 이임용 전 회장의 묘지. 포항북부 경찰서는 상습 도굴범이 도굴한 태광그룹 창업자의 유골이 사건 발생 일주일만(지난 1일)에 회수됐다고 발표했다.


청하 미남리가 고향인 이 회장은 타향 나가 크게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라 청하 주민들은 평소 이회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더욱이 한 때 이회장은 청하는 물론 포항 지역의 젊은 남녀 수천명을 부산 태광산업에 취업시켜 기술을 가르치는 등 실업자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설과 추석 명절에는 태광산업이라는 상호가 붙은 회사 버스 수십대에 지역 출신 근로자들을 나눠 태워 고향을 찾도록 배려하는 등 어려운 시절에 지역에 큰 베품을 실천했던 인물이다.

■ 태광그룹은 겉의 화려함보다 내실을 추구한 그룹으로 유명하다.
국내 재벌 가운데 재무구조가 가장 탄탄한 그룹의 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도 이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한다. 창업주인 고(故) 이임용 회장은 ‘내실경영’을 중시 했다는 것.

창업주인 고 이 회장은 지난 1921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미남리에서 중농이었던 부친 이우식씨와 모친 정막랑씨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창업주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간조(簡井)실업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등으로 일본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듬해인 42년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당시 22세 청년이던 그는 동네에 사는 이선애씨와 혼례를 올렸다.
신부 이씨는 이 창업주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한동네 유지인 이송산씨의 맏딸이다.

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기택씨와 ‘창업 동지’ 이기화(태광그룹 회장까지 지냄)씨는 이씨의 남동생이다. 이기화씨는 부산고·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뒤 이 창업주와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궜다.
이 창업주는 야당 거물이던 이기택씨와 처남매부지간이란 이유로 군사정권 시절 여러차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처남이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게 이 창업주에게는 결코 득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기업은 절대 정치와 연결돼선 안 된다”며 사업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찍히면 죽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정경 분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세무조사 요원들을 투입, 몇 날 며칠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에 전례 없는 전설이다.

이씨와 중매 결혼한 이 창업주는 공직(면사무소) 생활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6·25전쟁이다.
1951년 공직을 접은 이 창업주는 전쟁 이듬해인 1954년 부산 문현동에 모직 공장을 차리고 태광산업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바로 태광그룹의 모체다. 이후 1961년 전 삼호그룹 조봉구 회장과 동업을 시작했으나 동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창업주는 조 회장과 결별한 뒤 부산 가야동에 새로운 공장을 신설하며 태광산업사를 주식회사로 출범시킨다. 초기 태광은 이 창업주와 이선애씨가 함께 일궈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선애씨가 부산에서 소규모 직물공장에 손을 댔고 기업이 커지면서 이 창업주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기업경영에 합류했다.

이후 태광은 섬유를 기반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과 수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아크릴을 생산하던 태광은 눈부신 호황을 누렸다.

당시 아크릴은 양모 대체품으로 수요가 많았고 경쟁업체가 적어 태광의 고속 질주를 견인했다.
이 창업주는 스판덱스·나일론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했다. 섬유 호황기인 1970년대까지 내놓은 제품마다 시장의 돌풍을 일으켜 국내 최대의 섬유업체로 성장했다.

태광은 이 시기에 동양합섬, 고려상호신용금고, 흥국생명, 대한화섬, 천일사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화섬·석유화학에 금융이 붙으면서 태광은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약기를 맞은 셈이다.

■ 휴일에도 은행 이자는 큰다
태광그룹은 은행돈을 거의 안 쓰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타계한 이 창업주의 근검절약과 소탈함은 재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이 창업주가 살던 서울 장충동 2층 양옥집은 지금도 부인 이선애(78)씨가 지키고 있다.

이 집에는 30∼40년 된 옛 가구들이 그대로 있다. 회사 관계자는 “현대 정주영 회장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했다.”고 이 창업주를 회고한다. 그는 해외이든 국내이든 출장길에는 새로 지은 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법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십년 동안 단골로 다닌 낡은 호텔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점심도 설렁탕 한 그릇으로 후다닥 끝낼 정도로 무척 소탈했다. 이 창업주는 “은행돈을 빌리면 토·일요일 등 은행이 쉬는 동안에도 이자는 불어난다.”며 무차입 경영을 추구했다. 돈을 빌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도 않았다. 번 만큼 투자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매출 규모 1조 3000억원인 모기업 태광산업의 부채 비율이 거의 제로인 것도 이같은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절약 경영과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고 수익만큼 투자하는 실속 경영은 그룹을 더욱 튼튼하고 알차게 만들었다. 인수한 부실기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창업주는 또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공채 출신을 키워 경영진으로 기용했다.

기획력과 업무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의 처남 이기화씨는 이 창업주의 사후 태광그룹 회장에까지 올랐다. 또 공채 출신인 류석기·강석명·최운형씨 등이 중용됐다.
그의 이런 원칙적이고 대쪽같은 성품은 자녀들의 혼사로도 이어진다.

■ 화려한 혼맥… ‘연애결혼은 없다’
이 창업주는 생전에 모두 6명의 자녀를 뒀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의 연애결혼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그는 평소 사대부가의 유교적인 면을 강조해와 전통 관습을 무척 중시했다.

재벌가의 혼사가 연애결혼보다 중매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남3녀를 하나같이 중매결혼 시켰다는 것은 가풍을 짐작케 한다.
이 창업주는 집안 어른이나 친지들이 지체 있는 가문의 훌륭한 배우자를 찾아내 중매를 넣어 혼사를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자녀들의 혼사를 치러왔다.

이처럼 중매 일변도로 자녀 혼사를 치른 것은 중매야말로 좋은 가문의 좋은 배우자를 폭넓게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태광그룹 2세들의 혼맥은 서민의 가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격이 높고 화려하다.

태광의 사돈가가 사람들은 당시에 내노라 하는 정·관·재계의 유력 인사다.
하지만 이 창업주는 자녀들 혼사로 정·관·재계의 거물들과 사돈이 되었지만 이들을 경영에 끌어들이는 법은 결코 없었다. 지금도 모기업인 태광산업의 사장은 태광 신입사원 출신인 이화동(62)씨다.
이창업주는 이선애씨와의 사이에 식진(사망)·영진(사망)·호진(44) 3형제와 경훈(52)·재훈(50)· 봉훈(48) 세 자매를 뒀다. 이 창업주의 개혼(開婚)인 식진씨의 혼사는 비교적 평범한 집안과 이뤄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모두 유력 인사와 사돈을 맺는다.

이 창업주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태광산업 영업과장으로 있던 장남 식진씨를 1975년 개인사업을 하던 진재홍씨의 맏딸 임순(54)씨와 결혼시켰다.

식진씨는 태광산업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식진씨의 장인 진씨는 면방업체인 경방에서 일하다 독립했다.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공대 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식진씨 부부는 정아·성아·원준 등 1남2 녀를 뒀다. 장녀 정아(31)씨는 결혼했다.

연세대 상대를 나온 차남 영진씨는 어머니 이선애씨 친구의 중매로 장상준(전 동국제강 회장)가의 4남2녀 중 막내딸인 옥빈(54)씨와 1976년 결혼했다.

태광산업에 입사한 뒤 계열사인 대우파일, 흥국생명, 고려상호신용금고 등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다. 이들 사이에는 성준·성은 남매가 있다.
현재 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호진씨의 부인 신유나(42)씨는 롯데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71·일본 산사스식품 회장)씨의 맏딸이다. 호진씨는 대원고·서울대 경제학과(81학번)를 졸 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 경영학석사(MBA), 뉴욕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현준·현나 남매가 있다.

이 창업주의 세 딸은 모두 재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세자매 모두 이화여대 선후배이라는 점이다. 이는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창업주의 독특한 자녀 교육관이 스며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태광의 혼맥은 이대 출신의 세 딸을 출가시키면서 보다 화려하게 뻗어 나간다.

장녀 경훈씨는 진주의 대지주이자 LG그룹의 창업 멤버인 허만정가의 막내 며느리가 됐다.
경훈씨의 남편은 유통전문기업 GS리테일 대표인 허승조(56)씨다. 이들의 결혼은 경훈씨 친척 할머니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이임용가에서 허만정가로 이어가면 조홍제-송인상-신덕균가와 만난다.

이연두-박치현-김준성-김우중가와도 연결된다. 경훈씨는 남편 허승조씨와의 사이에 지안·민경 자매를 두고 있다.
이 창업주는 차녀 재훈씨를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장남 원용(56)씨와 결혼시켰다. 원용씨는 현재 경희대 의대 교수로 있다. 이 창업주는 재훈씨를 양택식가로 출가시키면서 정·관계 유력인사와 연결된다.

양택식가를 통해 홍진기-노신영-정주영가로 연이 닿는다. 김한수-김복동가로도 이어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이 결혼을 통해 업계의 라이벌인 한일합섬의 창업주 김한수가와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재훈씨 부부는 서윤·서정·서인·혁준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

3녀 봉훈씨는 한국베링거인겔하임 한광호가의 외아들 태원(49·한국베링거인겔하임 회장)씨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동우·상우·정우 3형제가 있다.
<기동취재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