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파(克日派) 박정희’
상태바
‘극일파(克日派) 박정희’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10.11.13 15: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셨던 호남 출신 인사로 고건 전총리와 장경순(張坰淳 1923~) 전국회부회장을 꼽는다. 특히 장경순전부의장은 6.25동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5.16쿠테타에 준장계급으로 가담하여 혁명정부의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민정이양 이후 공화당에 입당하여 전북 김제를 지역구로 6대부터 10대까지 5선(選)의원을 역임한 후 정계를 은퇴하고 여생을 우익활동에 매진했다.

장경순은 자신의 회고록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에 박정희 평가에 관한 일화(逸話)를 게재했다. 장경순은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과 각별한 사이로 교우했다. 노산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 간 장경순에게 노산은 한국사(史)의 3대(大) 인물론을 전개하면서 <위인 중의 위인>을 설파했다. 노산이 내세운 3대 인물은 세종대왕, 이순신, 박정희.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고,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쳐 나라와 백성을 구해 추앙받아 마땅한 위인이다. 그러나 세종과 이순신을 합친 것보다 더 월등한 업적을 쌓은 위인이 박정희라는 것이다.

노산의 박정희 평가는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을 기초로 치국의 근본이 국태안민(國泰安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때 전국의 인구가 250만명.

그 당시 지배계층 양반이 아니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했다. 세종은 백성들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지 못했다.

이순신은 왜적과 23번 싸워 23번 모두 이긴 성웅이었으나 그의 천재성은 군사부분으로 국한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세종과 이순신을 합친 정도의 위인(偉人)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1961년 혁명정부를 세우고 불과 20년 만에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산업화를 추진해 세계 10대 무역대국의 초석을 깔았다는 것이다.

장경순이 소개하는 <노산의 박정희 평가>에는 논지(論旨)의 정연함과 해박한 지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들은 친일(親日)문학인이 <친일파 박정희>를 찬양하며 <초록은 동색>임을 과시한다고 폄하했다. 과연 <박정희의 일생>이 친일로 시종(始終)한 것인가.

한국은 지구차원 행사의 3관왕이 됐다. 88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에 이어 G20서울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다시 한번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을 세계에 공인 받았다.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 교수(파리 정치대학)는 G20 서울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한국이 일본을 뒤쫓아 가는 시대는 끝났다”는 평가를 내놨다. 소르망 교수는 “한국은 삼성과 현대로 대표되는 기업가 정신과 혁신, 고품질로 성공을 거뒀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주요언론도 “어느 사이엔가 일본이 한국을 뒤쫓는 나라가 돼버렸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라는 장탄식 반성문들을 일제히 게재했다. 한국서 자란 미국인 인요한(John Linton: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한국을 잘 살게 만들고 바꿔놓은 것은 박정희, 근로자, 어머니의 힘, 바로 남한을 일으킨 3대 힘이다”고 진단했다.

남한을 일으킨 박정희의 힘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1965년 박대통령이 월남전 파병수락 대가로 얻어낸 1000만달러로 설립한 국책종합연구기관. Kist가 해외의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포철의 기술적 설계와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자동차·반도체·조선산업의 기술적 요람이 됐다. Kist과학자의 봉급표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네”라며 웃었다는 일화는 아직도 Kist에서 회자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1인당 국민소득이 125달러로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피와 맞바꾼 돈’으로 Kist 설립을 강행해 극일(克日)의 디딤돌을 놓았던 박정희는 한국사 최고의 위임임이 분명하다.

유수원 편집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