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奇蹟)의 연출가 金森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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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奇蹟)의 연출가 金森一”
  • 유민영 교수
  • 승인 2013.02.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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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영 교수- 전예술의전당이사장- 현 서울예술대학교 석좌교수
내가 김삼일 연출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부산에서의 제1회 전국연극제 때였다. 지금 작품에 대하여 자세한 생각은 나지 않지만 경북을 대표한 극단이라면서 매우 진지한 공연으로 단번에 부문(연기)상까지 거머쥐었기 때문에 김삼일 연출을 따로 불러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난 그에게서 놀랐던 것은 공연예술과는 거리가 매우 멀게 느껴지는 포항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과 연극을 독학했다는 점에서였다.

솔직히 포항이라고 하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강인한 해병대, 세계적인 제철공장, 그리고 바닷바람이 거세게 부는 어항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연극과 같은 섬세한 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선입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불모지에서 그는 극단을 조직하고 수년째 연극을 하고 있다면서 고향 포항을 문화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내비치는 데는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제3회 전국연극제 때는 대지의 딸을 연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제7회 때는 산불을 연출, 문공부장관상, 연출상, 연기상 등 3관왕을 거머쥐는 저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더욱 놀랐던 것은 그가 연출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포경업(捕鯨業)을 했던 선대의 권유에 의해서 수산대학교를 입학했으나 6.3한일회담 반대 시위 포항 주도자로경찰에 체포연행 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포기했다. 그러니까 연출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전문연극인도 받기 쉽지 않은 여러 가지 상을 부업으로 하고 있는 그가 계속해서 독점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가 불모지에서 순수연극을 일군 특이인물이라는 점에서 주저 없이 ‘기적의 연출가’라고 부른바 있다. 이러한 그의 실력과 성실성을 눈여겨보고 있던 대경대학교에서는 그가 KBS방송국 간부로 정년퇴임하자마자 스카웃하여 유능한 교수로서 자기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뒷받침 해주기도 했다.

대경대학 재직시절 그는 연극인이면 누구나 선망해마지 않는 한국 최고의 연극상(상금 5천만원)인 ‘이해랑(李海浪)연극상’을 당당히 받음으로써 무명의 지방연극인이 아닌 전국의 뛰어난 연출가로 확고하게 자리 잡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당장 서울에 와서 어떤 연출가와도 당당히 겨룰 실력을 가진 중진 연극인이 된 것이다.

내가 지켜본 그의 장기(長技)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지독한 학구파라는 점이다. 내가 아는 상당수 연극인들은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편이지만 김삼일은 술과 담배 같은 기호품은 입에도 대지 앉고 오로지 독서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가 영남대학 국문과와 단국대예술대학원에서 인문학과 공연예술학(연극·뮤지컬 석사)을 공부한 것도 방송국과 대경대학에 재직할 때였으니 4,50대에 만학으로 이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인물을 가리켜서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부른다면 김삼일이야말로 연극계에서 전형적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한다. 그 결과 그는 셰익스피어 등 외국명작들도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본다.

그가 포항시립극단 상임연출가로 봉사하는 동안 지역의 극단은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면서 포항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작품화한 것은 대단히 높게 평가해야할 작업이다. 만약에 지방극단이 서울의 아류 작품들을 리바이벌이나 하고 있다면 무슨 개성이 있겠는가.

두 번째로 그는 천부적 재능을 지님과 함께 대단히 근면한 연극인이다.

사실 예술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이해랑은 예술가가 대성하는 데는 90%의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고 주장한 바도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김삼일이 비록 시골에서 포경업을 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삼촌이 신파극단에 배우였고 아버지도 춤과 노래를 잘하는 등 가족의 DNA속에는 예능성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장기는 역시 그가 의리의 사나이라는 점이다.

그가 1960년대 후반 이해랑이동극장의 멤버가 되고 싶어 했을 때, 이해랑이 지역연극을 지키라고 권유했는데, 그 약속을 그는 지켰으며 이제 그는 가재를 털어서까지 포항에서 소극장을 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한번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 의리를 지키는 매우 드믄 인물이다.

네 번째로 그는 지독히 고향을 사랑하는 고집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가 실력 상으로는 서울이라든가 어디든지 가서 연극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가 당초 포항을 문화도시로 만드는데 일조하기 위해서 연극할 마음을 먹은 이상 자기 고향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인 듯하다. 그것은 60년대초 김삼일에게 영향을 준 향토문화의개척자 ‘인간상록수’ 재생 이명석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지방도시에서 자력으로 소극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다. 여태까지 지방소도시에서 소극장으로 성공한 예는 없다.

제발 그의 마지막 꿈이라할 김삼일자유소극장이 성공해서 포항이 문화도시로 거듭나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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