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식(式) ‘개발독재’는 경제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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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식(式) ‘개발독재’는 경제혁명”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15.04.0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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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고(故) 이광요 수상의 운구차량이 그가 평생동안 일군 싱가포르 간선로를 돌아 영결식장으로 향할 때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싱가포르 국민들은 폭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로(街路)에 도열해 오열로 국부(國父)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쿠리(苦力:노동자로 외국에 나간 중국인들을 부르는 속어)가 모인 어촌을 1인 GNP 5만6113달러의 금융·물류의 허브로 만든 ‘천사같은 독재자’를 영결하려고 도로를 메운 장면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 모습을 연상케 했다.

동갑내기 미국친구 키신저(전 국무장관)는 “글로벌 질서의 핵심을 꿰뚫은 국제정치의 멘토, 갈가시오, 친구…. 전세계가 당신을 그리워 할 것이다”고 추도했다.

‘동방의 거목’ 이광요는 ‘서방의 거목’ 키신저가 중국을 상대로 ‘핑퐁외교’를 펼쳐 ‘죽(竹)의 장막’을 걷어내도록 유도한 국제정치 전략가였다.

31년동안 집권해 ‘상전벽해’ 싱가포르를 만든 위인(偉人) 추도에 ‘22년 집권자’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전 수상도 나섰다.

이광요와 마하티르는 말레이 반도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지만, 영국 식민통치에 시달린 두 나라를 빠르게 현대국가로 탈바꿈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하티르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시아가 훌륭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적었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이광요와 ‘말레이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마하티르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 공통점이 있다.

이광요는 ‘박정희는 아시아의 3대(大) 지도자’로 평가했고, 마하티르는 동방정책(Look East)를 내걸면서 박정희식(式) 개발독재 전략을 채택해 88년부터 10년간 8%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광요와 마하티르는 국민들로부터 ‘경제영웅’으로 평가받아 ‘위인’ 반열에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화 업자’들로부터 ‘독재자’로 지탄받고 있다.

지난달 26일 YS(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시절 소통령(小統領)으로 불리면서 ‘무소불위 권력자’로 군림했던 김현철(YS의 둘째아들)이 자신의 트위터에 시정잡배 수준의 발언을 남겼다.

“싱가포르 전 수상이 사망했는데 거기에 쌩뚱맞게 박정희를 끼워 미화시키고 있네. 참 애쓴다, 애써”·“그런다고 동반추락한 딸(박근혜 대통령)의 지지도가 오를까”라는 독설을 내뱉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놈’이라는 YS의 증오심은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이어지고 있다.

IMF 국난(國難)을 초래해 수많은 직장인과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긴 ‘무능한 민주화 업자’의 ‘용렬한 아들’은 틈만 나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트윗질을 한다.

한국과 싱가포르·말레이시아는 ‘하늘이 내려준 지도자’의 통찰력·리더십의 결실 수확을 이어가고 있어 문민정부의 소통령(小統領) 김현철의 심통을 자극한다.

세계 10대 신문중 하나로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보수계 신문 ‘피가로’는 3월 12일자 경제면에 ‘프랑스, 수출 총액에서 한국에게 추월당했다’는 기사와 절망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실었다.

“2014년 11월~2015년 1월 사이에 프랑스의 수출총액은 453억달러인 반면, 한국은 475억 달러를 기록하여 2000년대 초반부터 14년 넘게 유지하던 세계 5위의 자리를 한국에게 내주고 말았다”·“한국은 불과 10년전까지 수출총액이 프랑스의 절반에 불과했으나 유로화(貨) 평가절하에 편승해 프랑스를 무너뜨렸다”는 기사에 “인구 4900만명인 한국에 인구가 6600만명이 되는 프랑스가 앞섰으면 앞섰지 뒤처지면 안된다”는 절규가 댓글로 달렸다.

피가로는 “한국산업은 전자와 자동차와 같은 많은 보석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표적 아이콘이 애플까지 도전자로 밀어내는 삼성의 위력이다”며 성장가능성을 주목했다.

지난해 3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IT전시회 때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독 삼성전자 부스를 자주 방문해 오래 머물렀다.

메르켈 총리는 한독 정상만찬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궁금증을 쏟아냈다.

“독일보다 산업기반이 취약한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이 나올 수 있었던 경영노하우와 핵심 경쟁력의 배경은 무엇인가.”

메르켈 총리의 질문에 대한 답은 독일 주간지 ‘차이트’의 한국경제 특집기사가 내놓았다.

“1961년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당시만 해도 신생기업에 불과했던 훗날의 재벌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시장 제패의 임무를 부여했다. 18년 동안 한국을 통치한 ‘개발독재’가 없었다면 한국이 이렇게 눈부시게 경제발전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견해이다.”
1972년 대선에서 야당후보 DJ(김대중)는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정책의 무효화(無效化)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대선결과는 박정희의 간발의 차(差) 승리였다.

그러나 중소기업 중심의 수출대체 산업화와 농업경제에 기반한 자급자족 사회를 추진하자는 좌파 DJ공약을 지지하는 세력도 두터웠다는 것이 드러났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시대’에 들어갔습니다”라고 천명했다.

1973년 울산석유화학단지,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구미전자 공업단지의 기반시설들이 준공 및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수출주도형 중화학 공업정책은 대내외적으로 반대가 심했고, 산업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국의 수출주도형 중화학 공업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념이 없었다면 추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DJ 등 좌파·야당의 강력한 태클 속에 추진된 중화학 공업정책을 착근시킨 것은 이병철·정주영 등 사업보국(事業報國) 애국심에 투철했던 기업인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취에 심통을 부리던 DJ·YS는 대기업 주도의 수출주도형 중화학 공업정책에 ‘빈익빈·부익부’ 태클을 걸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진저리를 내던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 ‘개발독재’로 맞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생, 이광요는 1923년생, 마하티르는 1925년생이다.

이들은 나이 순서대로 권력을 잡았다.

나이 순서대로 무대에서 퇴장했다.

또 이들은 서구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분별없는 추종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박정희는 그의 저서 ‘한국 국민에게 고(告)함’에서 “나의 주관심은 경제혁명이었다. 인간은 우선 먹고, 숨쉬고 나서 비로소 정치, 사회,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를 위해 나를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고 적었다.

우파논객은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젊은이라면 깊은 박정희의 이야기를 들어라”고 권고한다.

또 “그때 그 세월의 부모세대가 ‘왜 박정희에 열광하나’를 알아보라”고 호소한다.

지난 2일 서울행정법원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됐다’고 서술한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의 수정명령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 사학계는 어찌 좌편향 일색으로 제나라를 부정하는 놈들만 활개를 치는가. 북조선 돼지 3대(代)는 끊임없이 찬양해 대는가. 자유대한의 모든 민주적 혜택을 입고 살아가며 이적행위를 일삼는 좌익들을 기필코 심판해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YS는 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회견에서 “5·16은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킨 큰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5000년 보릿고개를 추방한 박정희의 등장은 한민족사(史)의 큰 축복임은 YS는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민주화’를 입에 달고 살아 인지(認知) 부조화를 보이는 정치건달은 ‘IMF 국난’을 초래하고 ‘국정농단’의 표본 ‘소통령 김현철’을 배출했다.

후안무치도 부전자전이다.

2년 뒤 박정희 탄생 100돌을 맞는다.

국부 이광요를 영결하는 싱가포르 국민들의 ‘고마움을 아는 심성’을 배우자.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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