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과 김성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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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과 김성근 감독’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15.05.2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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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포츠는 감독들의 리더십 경연장(競演場)이다.

감독들의 열정·책임감·냉정함을 바탕으로 구사하는 작전·조련술이 시합의 승패를 좌우한다.

특출한 지도력으로 발군의 성적을 창출한 감독은 리더십 명강사(名講師)가 되어 정부·기업의 초대장을 받는다.

작년 11월 7일, 한달전 10월에 한화 이글스 10대 사령탑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이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과 국가안보실 직원 250여명을 상대로 ‘리더십의 조건, 어떤 지도자가 조직을 강(强)하게 하는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특히 김 감독은 ‘리더의 조건’과 관련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리더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내가 욕을 바가지로 먹더라도 내 뒤에 사람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더의 추진력과 뚝심을 설파했던 김 감독은 2013년 강연료 수입에 대한 세금만 3억원 가량 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리더십 명강사였다.

그가 ‘손가락질을 피하지 않는’ 뚝심의 리더십으로 꼴찌에 맴돌던 ‘병든 독수리’를 ‘불사조’로 변신시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름은 헛되이 전해지는 법이 아니라는 뜻)’을 과시했다.

그의 강연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격돌·경합의 현장에서 승리를 도출해내는 지혜를 증거하기에 설득력을 갖는다.

2014년 시즌까지 한화경기는 9개 구단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경기로 분류됐다. 2009~2014년 6시즌 동안 한화 이글스는 다섯차례나 꼴찌를 기록했다.

3연패 4연패 등 연속 패배에 이골이 난 ‘병든 독수리’였다.

거액을 쏟아부어 FA대어(大魚) 정근우와 이용규와 계약하고,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의 명장(名將) 김응룡 감독을 영입했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화 그룹에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야구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최근 한화그룹 직원들이 웃음꽃을 활짝 피웠고, 한화 이글스 홈구장 대전의 야구팬들은 ‘마리한화’에 열광한다.

올시즌 프로야구에서 중위권으로 약진한 한화이글스는 ‘뜨거운 감자’로 돌변했다.

‘뜨거운 감자’ 한화는 ‘마리한화’와 ‘한화극장’으로 통한다.

‘마리한화’는 한화의 경기를 한번 보면 중독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마약(마리화나)과 같다는 뜻에서 지어진 별칭이고, ‘한화극장’은 한화의 최근 경기가 한국시리즈 최종전을 치르는 것처럼 손에 땀이 나는 박진감있는 경기를 펼친다는 뜻에서 나온 ‘은유’이다.

이 모든 것이 지난해 10월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이 10대 감독으로 취임하고 나서 불과 6개월 만에 쓰인 ‘반전(反轉)의 드라마’이다.

‘야구는 9회말 2사(死)부터’란 말이 있다.

극적 역전승을 상징한다.

한화 이글스 0:6 대패 위기 속에서도 역전드라마를 자주 엮어내 ‘병든 독수리’가 ‘불사조’로 탈바꿈 했음을 과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7전8기(七顚八起)’·‘인간승리’란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일곱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뜻으로 실패를 극복하는 불굴의 용기를 칭송한다.

또 인내와 끈기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는 ‘의지의 한국인’을 흠모한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의지의 승리’ 역전승을 7번이나 엮어내고, 끝내기 승리로 ‘야구는 9회말 2사(死)부터’라는 ‘인간극장’을 틈틈이 상연했다.

사실상 이기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던 열세를 기어이 뒤집는 저력을 발휘하는 한화 야구는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중독성 강한 ‘마리한화(마리화나)’가 되었다.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의 ‘근성있는 야구’는 9회말이 끝날 때까지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쫄깃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어 전국 야구팬들의 중독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며 전쟁터에서 힘들어 하는 병사들에 ‘끝까지 싸워서 이기자’는 필승정신을 고취했다.

김성근 감독은 ‘나의 야구에는 포기는 없다’며 초반에 난타당해도 불굴의 의지로 승리를 쟁취하는 ‘성취마인드’를 가르치고 있다.

조직과 리더십, 구성원의 역량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리더들이라면 한화 이글스의 약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74세(42년생) 고령의 김성근 감독이 엮어가는 ‘인간승리’는 한국 리더십의 전범(典範)이 되어가고 있다.

IMF 국난시절 온 국민들이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을 때 여자골퍼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은 ‘한줄기 희망의 햇빛’이었다.

특히 양말을 벗고 연못 속에 들어가서 샷을 하며 골프공을 걷어내고 기나긴 연장승부에 종지부를 찍을 때 국민들은 환호를 보내고 ‘우리도 일어서자’는 용기를 얻었다.

국민들은 ‘역전승의 달인’ 김성근 감독이 엮어내는 ‘마리한화 야구’를 보면서 성취의 갈증을 풀고 ‘반전(反轉)의 전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재일교포 출신 김성근 감독은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사안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갈고 닦아 ‘야구 철학자’로 숱한 명언(名言)을 남겼다.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달라보인다. 자기 한계를 규정짓지 말라. 한계를 그으면 거기까지 밖에 발전하지 못한다.”

‘자기의 한계 설정’을 거부하며 ‘꼴찌팀’ 환골탈태의 설계사로 ‘리더십’ 새 장(章)을 쓰고 있다.

그의 명언(名言)대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달라보인다’는 극과극의 시각차(差)를 정치판에서 목격할 수 있다.

1964년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절반수준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간신히 이겨 계속 대권을 잡았다.

1964년 독일을 방문해 경제개발 종잣돈 3000만 달러 차관을 얻고, 한일협정을 타결시켜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았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 산업인프라 구축자금을 움켜쥐었다.

1964년은 대한민국 대도약의 원년(元年)이 되었다.

1968년 2월 1일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했다.

‘설계자’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의 1일 생활권화를 이루는 ‘물류 대동맥’ 건설이라고 역설했고, ‘민주화 투사’ 김영삼·김대중은 ‘우량농지훼손’·‘바람쟁이들이 첩을 자가용에 싣고 달릴 부자(富者)전용도로가 될 것이다’며 반대깃발을 앞세우고 건설장비 앞에 드러누웠다.

박정희 대통령과 양김(兩金:김영삼·김대중)은 ‘생각의 차이’로 극한대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외화부족으로 제대로 시작도 못하게 되자 ‘수출제일주의’를 추진하면서 전쟁용병 비난을 각오하고 ‘월남파병’을 결단하고, 고뇌 심경을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로 표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일성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저지하는 방편으로 방위산업과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을 병행추진했다.

양김(兩金)은 ‘망국(亡國)의 지름길’이라고 공격하고 ‘수출제일주의’를 ‘수입대체산업육성’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세계 7대(大)무역대국(大國)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성취의 역사는 앞날에 대한 예견력(豫見力)과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 박정희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대권잡기에 올인했던 양김(兩金)을 제압해서 가능했다.

YS(김영삼)이 초래한 IMF 국난(國難)과 DJ(김대중)의 카드대란(大亂) 사태를 지켜본 극좌파 백기완은 ‘폭탄발언’을 남겼다.

“박정희는 좌익과 민주화업자 등 3만명을 괴롭히긴 했지만 3천만명의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었는데 YS과 DJ는 무려 3천만명을 못살게 해놓았다.”

특히 북한의 김정일에게 5억달러를 헌상해 핵무장 종잣돈을 마련해준 DJ는 ‘예견력·통찰력 없는 3류 좌파이다’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성근 감독은 아웃사이더 출신이었으나 확신에 찬 예견력과 통찰력으로 ‘한강의 기적’·‘마리한화 야구’를 도출했다.

진귀한 역사는 손가락질을 피하지 않는 통찰력 깊은 지도자들이 엮어 냈다.

소박한 풍모의 거인(巨人)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리더십을 발휘해 ‘의지의 한국인들’을 양성했다.

그들의 눈물과 고뇌의 결단, 현장리더십이 한국인들의 영혼 속에 각인되고 있다.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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