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은 우파(右派) 대통령이 만든 ‘기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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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은 우파(右派) 대통령이 만든 ‘기적의 역사’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15.08.15 03: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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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대한민국의 ‘천지개벽 역사’가 조명되고 있다.

1945년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70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와 경제는 광복 이전 5000년 동안 겪어온 것보다 훨씬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이른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대변화가 전개됐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좌익들의 ‘역사 폄훼’도 뒤따른다.

지난 7월 26일 ‘친부(親父)의 나라’ 케냐를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청년들을 독려하면서 한국을 ‘본보기 국가’로 제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케냐 수도 나이로비 실내체육관에 모인 4500명의 젊은이들을 상대한 연설에서 “내가 태어날 때만해도 케냐의 경제규모가 한국보다 컸지만 현재는 그 반대가 됐다”며 “한국이 성공한 일을 케냐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교육분야 발전 등에 대해 여러번 성공모범사례로 인용(칭찬)했다.
특히 2011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한국가정은 우리보다 훨씬 나은 인터넷 접근성을 갖고 있다”며 “한국을 부러워하며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의 대통령’도 찬탄하는 ‘천지개벽의 역사’를 한국의 좌파들은 ‘평가절하’한다.

새민련 원내대표 이종걸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특별전시회에서 “해방 후 지난 70년은 친일(親日)과 변절자를 위한 조국이었다”며 삐뚤어진 국가관과 역사관을 드러냈다.

2003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 84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대통령 노무현은 “해방 후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불행한 역사를 겪었다”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사실상 부정하는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새민련 원내대표 이종걸의 ‘광복 70년 역사’ 부정은 ‘해방전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는 노무현의 발언과 좌파정체성을 같이 한다.

좌파들은 좌우합작 정부수립을 추진했던 ‘상해 임시정부 수반’ 김구 노선을 지지하며 이승만의 단일정부 수립을 매도하며 ‘건국 대통령’을 친일파(親日派)로 몰아간다.

‘사회민주주의 연대’ 대표 주대환(전 민노당 정책위 의장)은 “좌파세력이 친일파 논란으로 보수진영을 제압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이제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을 얻기 힘든다”며 “건국에 참여한 임정(臨政)의 요인(要人) 신익희·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산업화·민주화가 대한민국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기적은 평등한 자연농(農)의 나라 대한민국 탄생이다”고 역설한다.

좌파진영 이론가로 활약했던 주대환은 “이승만의 건국·농지개혁은 ‘세계사의 기적’이다”·“백범 김구를 중심에 놓는 역사는 이제 그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상해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독립운동 공적은 크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한 과오도 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었을 때 김구는 ‘비탄의 성명’을 발표했다.

김구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 김일성의 압도적 군사력이 대한민국을 뭉개버릴 것으로 예상했다.

김구의 좌우합작 노선이 김대중의 ‘낮은 단계 연방제’로 이어져 좌파들의 대한민국 건국부정·‘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폄훼의 연원(淵源)이 됐다.

이승만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공산주의 토지 국유화·집단농장의 비생산성을 내다보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건국을 결단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가슴앓이’ 소작농(農) 신세를 벗어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자영농(農)이 된 농민들이 자발적인 중노동을 쏟아 붓고, 창의력·교육열을 발휘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해방당시 남북한의 농지면적은 거의 같았다.

각각 200만 정보, 남한은 논이 더 많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북한의 인구는 남한의 절반수준이어서 1인당 경지면적은 남한의 두배나 되었다.

이승만은 지주계층 출신 여야의원들 일치단결의 반대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 농지개혁을 강행했다.

200만 정보의 농지를 200만 농가에 1정보씩 나눠주었다.

1년에 30%씩 5년에 150% 상환을 대원칙으로 정해 유상(有償) 분배했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생명줄이었던 농지를 헐값에 빼앗아, 친일파에게 시달렸던 소작농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소작농이었던 농민들은 ‘내 땅’을 갖게 된 것이 너무 좋아서 대개 3년만에 농지값을 갚았다.

1957년까지 100% 갚았다.

이승만은 동양사회의 이상형인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한 ‘영특한 지도자’였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5년간 나치점령치하에서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한 반역자들을 처단한 드골보다 수십배 강력하고 광범위한 친일파 척결이었다”고 우파논객들이 평가하고 있다.

원로 서양사학자 이인호 교수(KBS이사회 이사장)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은 1776년 미국건국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인류사(史)의 반열에서 음미해야 할 세계사적 사건이다”고 평가했다.

‘소련군의 앞잡이’ 김일성이 사회주의 체제를 정착시킨 북한의 참혹한 실패를 목격하고도 김구식(式) 좌우합작을 지지하고, 이승만을 ‘분단의 주범’·‘분단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북한의 김일성은 1958년 이전까지 30%의 현물농지세를 거뒀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곡 생산성은 일제(日帝)시대보다 나았다.

1958년 전 농지를 협동농장(집단 농장)으로 만들었다.

농지의 국유화로 ‘내 땅’이 원천적으로 부정되었다.

‘집단농장원’ 농민들에게 의욕이 날 리가 없었다.

생산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북한 주민들은 1996년에도 겨우 540g(하루 섭취 곡물)을 섭취했다.

일제 말기 공출로 곡식을 빼앗겼던 시절에도 하루 평균 756g을 섭취했었다.

김일성이 만든 ‘인민의 낙원’의 주식섭취량은 한국인이 가장 공핍했던 시절로 평가받았던 조선조 철종시대의 수준이라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광복 이후 70년 동안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김일성의 기만적 농지개혁과 파멸적 협동농장화, 김정일의 선군정치로 북한은 일제시대보다 훨씬 못한 ‘거지공화국’·‘인민의 지옥’으로 전락했다.

‘주체 103년’ 연호를 사용하는 ‘김씨 조선’이 남한의 적화(赤化)를 획책하고 있다.

남한은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농작물 생산이 급격히 늘어났으나 ‘보릿고개’를 극복하지 못했다.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 벼 재배 장려·종자개량으로 1956년 340만t 주곡 생산량이 1966년 703만t으로 두배 이상 늘어났다.

1978년에는 821만t까지 늘어났다.

1990년 이후에 600만t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시장경제 도입·농지개혁을 번영의 디딤돌 삼아, 박정희 산업화 대통령이 수출주도 중화학 공업정책을 성공시켜 경제규모 세계13위 대국(大國)으로 도약했다.

한국 경제규모는 1953년 13억달러에서 2013년 1조3천43억달러로 1천3배이상 커졌다.

1인당 GNP는 66달러에서 390배 이상인 2만5천937달러가 됐고, 올해 3만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노무현의 말대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 이종걸 새민련 원내대표의 주장처럼 “해방후 70년은 친일파만의 조국이었다”면 망해도 진작 망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따라배우기 본보기’로 칭찬하는 ‘큰나라’가 됐다.

남북한 체제의 정통성 판별기준은 극빈(極貧)탈출여부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하기 위한 윤리, 즉 타협의 정신도 극빈의 상태에서는 도출할 수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의식(衣食)이 족(足)해야 예절을 안다”고 한다.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못한 북한 김씨조선을 흠모하는 종북(從北)들의 ‘친일파 타령’은 정의가 실종된 넋두리에 불과하다.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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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5-08-19 07:26:08
한번씩 들어와서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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