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를 위한 반대’ 되풀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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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위한 반대’ 되풀이 되는가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09.11.1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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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한국의 1인 GNP는 80달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과 굶주림을 등짝에 지고 살았던 나라가 40년 이후 세계 10대 무역대국(大國)으로 도약했다.
세계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경탄한다. 세계적 대도약에는 디딤돌이 있었다.

그것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서독수상의 회담이었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창했던 경제학자 에르하르트는 친기업정책으로 패전과 분단의 고통에 신음하던 서독경제를 부흥시킨 주역이었다.
‘라인강의 기적’ 설계자가 아시아 최빈국 대통령을 만나 ‘위대한 훈수’를 늘어놓았다. 경제석학 67세의 서독수상이 군인출신 47세 대통령 박정희에게 부정(父情)어린 조언을 조목조목했다. “한국에는 산이 많더라.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독일을 보라.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를 깔았다.

한국에도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달릴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자동차가 다니면 고용이 늘고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고 세금이 들어온다.”
듣고 있던 박대통령의 눈이 빛났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다. 그러니 제철소를 지어라” 에르하르트 수상은 비서를 불러 회담시간 30분 연장을 지시하고 조언을 이어갔다. “자동차연료를 만들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앞으로는 석유화학공업시대다. 그리고 조선업도 해야 한다” 에르하르트 수상의 조언은 ‘한국의 급소’를 자극하면서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일본과 손을 잡아라. 이것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듣고 있던 박대통령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개의치 않고 직언을 이어갔다. “독일은 프랑스와 32번을 싸웠다. 전투에는 한번도 진 일이 없지만 전쟁에는 모두 패했다. 독일인은 지금도 한(恨)이 맺혀있다. 그러나 전후(戰後) 아데나워 수상은 프랑스 드골대통령을 찾아가 손을 잡았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박대통령은 격앙된 어조로 반박했다. “우린 일본한테 매번 맞기만 했다. 36년동안 지배당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 수상은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에르하르트’가 나눈 두시간 남짓한 대화가 한국의 역사를 바꾸는 밑그림을 만든 셈이다. 1967년 5월 박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야당·학계·언론이 들고 일어났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시기상조이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이듬해 2월 428Km 대장정의 삽질이 시작됐다. DJ(김대중 전대통령·당시 국회의원)는 서울 톨게이트 공사판에서 드러누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우량농지 훼손 웬 말이냐”·“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부유층 전유물인 고속도로 결사반대”란 피켓을 들고 시위에 동참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자칭하던 DJ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반대에 앞장섰다. 최근 김문수 경기지사는 “DJ는 경부고속도로 반대·수출입국반대 등 다 반대했다. 평생 그런식으로 살았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다. 한쪽엔 과도한 비판을 하고 다른 쪽엔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최근 4대강 살리기 사업공사가 본격화 됐다. 수리학(水利學)을 전공한 학자들은 “외국의 사례를 보면 한국의 하천은 가장 비효율적으로 이용되고 방치돼 왔다”며 “4대강(江)살리기는 국가경쟁력을 일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며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400개 좌파 시민단체와 변호사모임 등은 ‘4대강 죽이기’ 저지에 나서겠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한국의 좌파들이 ‘친일(親日)타령’에 이어 새로운 일거리를 찾은 모양새다. 진보·평화·개혁을 앞세운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풀이 되는 것인가. 시간의 역사가 그들을 또 다시 심판할 것 같다.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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