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에 찬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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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에 찬 ‘친일인명사전’
  • 유수원(편집인)
  • 승인 2009.11.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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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한국의 최고 시인이다.
그의 시(詩)는 유교·불교·노장철학·토속신앙을 넘나들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러나 그는 생명파 시인이 아니라 친일파(親日派)시인으로 각인됐다. 그는 고은(高銀)등 수많은 진보·좌파 시인·문학가들의 스승이었다.

친일문학작품 목록을 발표한 민중시인 신경림(민족작가회의 회장 엮임) “미당은 친일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좋은 작품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사람들은 공과(功過)·영욕(榮辱)이 교차하는 삶은 산다. 그래서 진정한 평가는 관(棺)뚜껑을 덮고 난 이후에 가능하다고 한다. 과(過)란 단면만 보지말고 공(功)도 함께 보자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 중에 친일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큰 공(功)을 쌓은 인물은 또 없을까.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전대통령이 등재되어 보혁갈등이 다시 불붙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혈서를 쓰고 자진해서 만주국 장교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국이 광복될 때 28세의 식민지청년장교이었을 뿐이다. ‘박정희의 독보적 연구가’ 조갑제닷컴대표 등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과 엄연히 다른 만주국 위관급 장교로 1년 5개월동안 근무했다.

박정희는 가난했지만 면학의지와 상무(尙武)정신이 강했다. 학비전액을 보조받는 대구사범학교를 지원했고, 보조에 따른 교사의무 근무기간이 끝난 1940년 만주로 떠나 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42년 학업성적이 뛰어나 일본육군사관학교본과생으로 편입학했다. 1944년 3월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5관구예하 보병 8단(團)에 배속되었다.
연대규모 보병 8단의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 상교(上校). 박정희는 그의 부관이었다. 만주군 8단은 만리장성 북쪽 열하성 승덕(承德)에 포진해 중국 공산당 8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1945년 7월 중위로 승진하고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박정희는 북경으로 이동, 9월 21일 광복군 제3지대(평진대대)에 입대해 제2중대장 보직을 받았다.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출판기념회장에 ‘개새끼처럼 말새끼처럼 만주벌판을 달리며 독립군을 토벌한 박정희...’ 라는 현장구호를 내걸었다.

이쯤 되면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저의가 드러난다. 일제때 우리 독립군이 활동했던 지역은 남만주·연해주였다. 박정희가 배속됐던 만주군 8단이 우리독립군을 토벌하려면 열차를 타고 25시간이상 이동했어야 한다. 만리장성 북쪽에 배속됐던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허구이다.

당시 독립군은 장개석 군(軍)과 연락하며 만주군 동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일본 관동군의 졸개로 파악되었다면 광복군중대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겠는가. 친일인명사전이 박정희를 친일파로 덧칠해 대한민국 정통성허물기를 시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1965년 한일협정체결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극일(克日)노력을 전했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브리핑룸에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을 비교한 차트를 잔뜩 걸어놓고 “일본을 따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30여년전 일본 소니의 하청업체였던 삼성전자가 소니 등 일본 대기업 전자 9개회사의 영업이익을 합친 것보다 두배나 많은 이익을 창출해 냈다.

삼성전자는 하청이란 작을 친일을 통해 극일(克日)이란 성과를 도출한 것이다. 박정희는 작인 친일을 통해 닦은 안목으로 대한민국의 새 지평을 열었다. 친북좌파들이 민족정서를 동원해 ‘박정희 폄하’를 시도하는 것이 과연 성공할까.
그들이 ‘김일성 받들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
유수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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